[마을에 띄우는 글] ‘익어감’
2021-10-0510월_ ‘익어감’
익어감
가을의 깊이는 익어감에 있다. 곡식과 열매들이 소리 없이 안으로 안으로 익어가며 맛이 들고 색이 농익는다. 인간으로서는 자연의 한없는 관대함에 고개 숙이고 감사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돌아보게 된다. 사람의 능력과 권한이 어디까지 인지. 우리 또한 자연의 일부여서 자연의 파괴가 결국은 우리 생명의 파괴이고, 자연과 더불어서만 우리의 생존도 행복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단순한 농부부터 위대한 철학가,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 자연으로부터 양식은 물론이고 위로와 지혜, 영감을 얻지 않는가.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자연스레 자연을 닮아갈 수 있다. 우리의 인생도 익어갈 수 있다. 익음은 외부의 강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스스로만 익을 수 있다. 생태계가 건강하면 그 안에서 자라는 자연물들은 제 맛과 제 색을 내며 더 잘 익는다. 우리의 삶이라고 해서 다를까?
우리 삶, 생활의 생태계라고 하면 자연과 사회 두 측면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기후와 바로 직결되는 자연생태계 환경은 그곳에서 태어나고 그곳의 공기와 물을 마시고, 그곳에서 나는 먹거리를 먹고 자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DNA와 삶의 방식, 언어, 사고방식에 은밀하지만 뚜렷하게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제2의 생태계라고 할 수 있는 사회환경 또한 마찬가지다. 타고난 기질보다는 성장환경이 한 사람의 성격과 삶의 여정을 더 크게 좌우한다는데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사회환경은 넓게는 국가, 좁게는 교육과 일, 거주 중심의 사회구조와 관계망으로 이루어진다. 인터넷과 IT기술이 발달하면서 교육과 일의 환경은 더 이상 학교와 직장 공간에 국한된 환경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삶의 온도를 체감하는 생활터전이라 할 수 있는 사회적 생태계는 거주지 중심의 마을에 실재하게 된다. 지금까지 주로 학교와 일터에서 익혔던 사회관계망이 마을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살아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배움, 돌봄, 일, 여가활동을 통해 삶의 뿌리를 뻗으며 건강하게 자라고 익어갈 수 있는 삶의 바탕으로서의 생태계인 마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마을학교, 마을자치, 마을 통합돌봄 등의 필요와 의미가 점점 더 부각되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건강한 숲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나무와 식물들이 뿌리가 얽혀 든든해지고, 서로를 보충하여 그만큼 다양한 종의 새와 동물, 곤충 등이 어울려 살아간다. 이런 숲이야말로 온갖 생물들이 제 맛과 제 색을 내며 자라는 제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규율과 규칙, 상하 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관계 맺음이 가능한 마을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개성과 재능을 발산하며 제 세상을 찾고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삶이 맛나게 익어가는 모습이 실로 아름답지 아니할까.
글/사진_ 연인선(용인시 마을공동체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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